(생활법문) 카톡을 지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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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증심사 댓글 0건 조회 801회 작성일 19-12-16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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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을 지웠어요>


몇 해 전인가 얼떨결에 카카오톡을 지운 적이 있습니다. 이왕 지운 김에 페이스북까지 지웠습니다. 딱히 무슨 거창한 의미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말 못 할 사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주 우연히 아는 사람이 카톡 친구들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카카오톡을 탈퇴했다가 가입했다고 해서, ‘나도 한번 그래 볼까…’ 한 것이 그만 일이 커지고 말았습니다. 


일단 카톡을 지우고 다시 설치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연락처에서 친구등록을 하니 180명 정도가 순식간에 ‘친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한참 동안 그 ‘친구’라는 사람들을 훑어보았습니다. 누군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사람부터, 업무상 전화하는 사이, 일 때문에 자주 보는 사람, 한동안 자주 보고 지냈지만, 요즘은 연락하지 않고 지내는 사이,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 도반 등 ‘친구’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뭉뚱그리기에는 너무 다양한 관계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 180명 중에 내 마음을 다 열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혼자 생각해보았습니다. 다섯 손가락으로도 충분할 듯했습니다. 그중에서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볼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해보니 딱 부러지게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친구’가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거품을 싹 걷어내고 나니 초라한 실상이 드러났습니다. 


카톡 친구들을 한참 동안 훑어보고 나서 카카오톡에서 카카오스토리를 보려고 하니, 카카오 계정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만들다가, ‘굳이 만들 필요가 없는데 왜 만드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중간에 취소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앱이 좀 이상해졌습니다. 그래서 ‘에잇, 지우고 다시 깔지! 뭐…’하고는 아무 생각 없이 지워버리고 다시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24시간 이내 재가입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하루 동안 카카오톡을 쓸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나라는 사람이 그렇게 친화적이지도 못하고, 또 대인관계에 목숨을 거는 스타일도 아닌지라 내 핸드폰의 카톡은 은근 한가한 편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만 해도 카카오톡을 업무용으로 쓰는 것도 아니어서 카카오톡이 없다고 해서 불편하거나 문제 될 건 별로 없었습니다. 


별 생각 없이 시작된 일이 제법 커져 버렸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페이스북까지 지워버려? 어차피 노트북으로도 할 수 있으니 굳이 핸드폰에서까지 페이스북을 할 필요는 없잖아?’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습니다. 그래서 잠깐의 망설임 끝에 페이스북도 지워버렸습니다. 사실 시도 때도 없이 틈만 나면 페이스북에 들어가곤 하는 자신이 은근히 신경 쓰이긴 쓰였습니다. 페이스북 앱 아이콘에 친절하게 ‘좋아요’나 댓글을 단 숫자가 표시되면 굳이 그걸 확인하려고 들어가고는 했습니다. 아이콘에 표시가 되질 않더라도 ‘업데이트가 되질 않아서 그런 건 아닐까?’ 혼자 지레짐작으로 생각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페이스북에 기어코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알고 보면 이런 것이 다 중독입니다. 중독이란 잣대로 세상을 보면 인간이 만든 문명에서 중독을 빼고 논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휴대전화, 인터넷, TV, 커피, 담배, 각종 취미, 쇼핑, 일 등. 개인의 삶에서 중독되지 않는 것을 찾아보기가 오히려 힘듭니다. 문명이 어찌 보면 중독의 산물인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심지어 친구, 연인, 가족 같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다분히 중독성이 있습니다. 물론 우정과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멋있게 포장되긴 합니다만 중독의 요소가 전혀 없다고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개인의 행동에는 습관이란 것이 버젓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중독의 증거라면 증거입니다. 


이게 다, 목마름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에 대한 목마름 때문입니다. 소유하고자 하나 소유하지 못하면 소유에 목말라 합니다. 소유에 대한 갈증은 소유를 향한 집착을 불러일으킵니다. 지배하려고 하나 지배하지 못하면 지배에 목말라합니다. 지배를 향한 갈증은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하지 못하면 사랑을 갈구합니다. 사랑을 향한 갈증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에 집착하게 합니다. 그 결과 소유에 중독되고, 지배에 중독되고, 사랑에 중독됩니다. 중독은 그저 결과일 뿐입니다. 곰곰 생각해보면 나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주는 사람이 반드시 그 사람일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내 안의 목마름이지 내 밖에 있는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항상 뭔가를 갈구합니다. 금방 해소될 것 같지만, 절대 해소되지 않는 목마름. 이것이 바로 중독의 원인입니다. 마치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먹는 순간은 갈증이 해소되는 듯하지만, 오히려 갈증이 더 심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금방 해소될 것만 같은 갈증이 마치 삶의 중요한 요소라도 된 것 같습니다. 


욕망은 삶의 원동력입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만큼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이 욕망입니다. 그래서 욕망을 이루고 나면 그에 대한 보상이 따라옵니다. 바로 쾌락입니다. 식욕은 생존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그러나 식탐은 건강을 해칠 뿐입니다. 식욕이 식탐으로 변질하는 것은 식욕에 대한 보상인 먹는 즐거움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욕망보다 욕망의 보상인 쾌락에 마음이 뺏겨 버리면 욕망하던 그 대상에 중독되어 버립니다. 


쾌락은 욕망이 인간에게 준 선물입니다. 그런데 눈앞의 쾌락이 주는 일시적인 기쁨을 행복으로 착각하게 되면 쾌락에 눈이 멀게 됩니다. 눈이 멀어 욕망을 보지 못하면 쾌락에 마음을 뺏기고, 쾌락에 마음을 뺏기면 쾌락에 조종당하는 신세가 됩니다. 더 이상 나의 마음과 몸은 내 것이 아니라 쾌락의 소유가 되고 맙니다. 그 무엇인가에 마음을 빼앗기면 그것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헤어나오지 못하면 중독되고, 중독되면 질식되고, 질식되면 죽습니다. 육체적인 죽음만 죽음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소유 당하여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정신적인 사망 선고나 다름없습니다. 


소유하고자 하면 할수록, 소유하고자 하는 대상에 소유 당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욕망을 키우면 키울수록 욕망에 눈이 멀어 욕망은 탐욕이 되고 맙니다. 탐욕으로 변질된 욕망은 우리를 소유하여서 마음대로 조종합니다. 중독은 단지 탐욕의 결과일 뿐입니다.


물론 나만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카톡 수신을 거부할 권리가 내게는 없습니다. 하루가 지나 카톡에 다시 가입했습니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페이스북을 마음에서 놓지 못하다가 작년 여름 무렵 완전히 관뒀습니다. 곧이어 인스타그램도 완전히 관두었습니다. 페이스북이든 인스타그램이든 다 끊고 난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니, 중독은 그저 단순한 중독이 아니었습니다. 뭐든 소유하고자 하면 소유 당한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우치게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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