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법문) 카톡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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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증심사 댓글 0건 조회 787회 작성일 19-12-17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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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스마트폰이 생활필수품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입니다. 주된 역할은 음성 통화지만 어느 날 갑자기 카톡이 등장하면서 문자를 주고받는 것이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정착되었습니다. 물론 화상통화라는 것이 제법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생활의 일부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방식 역시 핸드폰이 등장했던 초기부터 있었습니다만, 카톡은 기존의 메시지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카톡은 실제 대화하듯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 하염없이 가능했습니다. 심지어 몇 달 전 대화도 저장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대화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진, 동영상, 소리, 이모티콘 같은 것들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공짜니 순식간에 생활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카톡 같은 문자 서비스의 한계는 상대방을 육신의 눈으로 보고 육신의 귀로 들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대화하는 것처럼 되려면 상대방의 적극적인 반응이 꼭 필요합니다.  현실 속에서 한 사람은 부지런히 말하고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 볼 일만 하고 있다면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모두, 상황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메시지의 세계에서는 다릅니다.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맞대고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받는 이가 보는 것은 한두 줄의 짧은 문장일 뿐입니다. 가볍게 무시하거나, 답문자 보내기를 깜박 잊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문자가 왔는지 어떤지도 모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실시간적 상황이 깨지는 것입니다.  이유는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보내는 이가 받는 이의 현재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보내서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받는 이가 이런저런 이유로  대화를 거부하고 싶어서 일수도 있습니다. 현실세계에서 대화를 거부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메시지 상에서는 실제 면전에서의 대화보다 훨씬 쉽게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보내는 이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는 첫 번째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감정은 두 번째로 상황으로 쏠리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받는 이는 흔히, “내 문자를 무시한다”라고 말합니다. 문자에 답장을 안하고 무시히면 아무리 이성적으로는 아니라고 해도 자신이 무시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반응 없음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보내는 이의 심리적 상처는 점점 더 부풀어 오르게 됩니다.  보내는 이는 마치 면전에서 무시당할 때와 유사한 심리적 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실제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딱딱한 문자로 대화를 주고받는 문자서비스는 전화나 실제 대화하는 것보다 친밀감을 훨씬 덜 느끼게 합니다. 육성이 아니라 화면 위의 글자를 매개로 대화가 이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면 문자 서비스는 실제로 보거나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짐짓 지어낸 이미지를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자신의 상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지어내서 그 모습만 상대에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문자에서 사용되는 특수한 표현들, 과장된 표현, 이모티콘이나 스티커를 이용한 과장된 표현 방식들이 현실세계와는 다른 문자 서비스 세계만의 또 다른 자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문자 서비스 세계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아바타는 어쩌면 현실세계의 자아를 본인이 원하는 대로 성형 수술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육신의 외모는 병원에서 비싼 돈을 들여서 성형수술을 해야 뜻한 바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자 세계 속의 아바타는 병원에서 할 수 없는 성격, 인간성 같은 정신적인 것들을 공짜로 성형 수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문자세계 속의 내 모습은 실제 내 모습이 아니라 남들에게 보이기를 바라는 내 모습입니다.  


만약 무료 화상통화가 보편화된다면 아마도 지금의 문자 서비스 시스템이 갖는 부작용도 많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화상통화의 현실화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일상의 일부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화상통화는 현실세계와 지나치게 가깝기 때문입니다. 문자 서비스는 그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현실세계의 사람들은 현실세계가 가지지 못하는 문자 세계의 매력에 이끌릴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핸드폰을 쓰지 않으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하지만 이런 논리로 하자면 모든 문명의 이기들을 거부해야 합니다. 인터넷, 텔레비전, 수세식 변기, 싱크대, 자가용, 카페, 대형 백화점, 마트 같은 이 모든 것들을 거부하고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속에서 더불어 살면서 그들에게 현혹되거나 탐닉되지 않고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카톡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먼저 아무리 내가 작성한 문자라 하더라도 내가 문자를 보내는 순간부터 그 문자의 소유자는 받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 문자의 통제권, 처분권은 받는 사람의 몫입니다. 내 손을 떠난 것이기에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 문자에 보이지 않는 실을 매달아 원격조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텔레파시를 이용해서 받는 이의 마음을 내 뜻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내 손을 떠난 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보낸 문자를 가볍게 지르밟든, 장황한 답 문자를 보내든, 몇 시간이 지나서야 의례적인 멘트로 답을 하든, 그것은 받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내가 보내는 문자는 내가 그 문자를 작성하고 있는 동안만 나의 통제 하에 있습니다.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내 맘대로 하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행동도 없습니다.  


두 번째, 내 모습은 내가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뿐, 고정된 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영어로 인간을 pers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페르소나’, 즉 가면이라는 그리스 말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남에게 보이는 모습과 실제 모습이 달라서 남에게 보이는 모습은 마치 가면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가면을 벗으면 본래 모습이 나타날까요? 인간이라면 평생 동안 누구나 변하지 않는 자기 본래의 모습이 있을까요? 다만 이런저런 환경에 처해서 본래 모습과는 다른 가면을 그때그때 만들어서 쓰고 있는 것일까요?  


사람의 몸은 대략 3년이면 모든 세포가 확 바뀐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3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몸이라는 말입니다. 생각은 더합니다. 수시로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10대의 내가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고 살았는지 지금의 나는 전혀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그 때의 나도 나이고 지금의 나도 나이다”라고 내 자신이 생각하고 믿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오로지 글자로만 만나는 문자 서비스의 세계에 걸맞은 내 모습을 만들어서 나라고 믿으면 그것은 내가 되는 것입니다. 평생 동안 변하지 않는 본래의 나 같은 것은 애당초 없습니다. 수시로 변하는 가면이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가면 뒤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스마트폰 속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해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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