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법문) 노년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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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증심사 댓글 0건 조회 999회 작성일 19-12-17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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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친구>


어느 날, 아침에 양치하다가 문득 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이 들어 남는 건 친구 밖에 없어!'  


젊었을 때 친구는 마치 공기 같은 존재였습니다. 항상 몰려다니며 일상을 같이했습니다. 청춘의 친구란 허물이 없고, 내게 지적 질을 해도 마음이 상하지 않는 사람, 딱히 할 일 없으면 연락해서 노닥거리는 사람, 거창한 사상과 가치관 같은 것을 같이 하지 않더라도 자투리 시간을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청춘의 친구는 '나'를 무장 해제시킬 만큼 강한 구심력으로 서로를 끌어 당겼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친구들과 일없이 만나 쓸데없는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던 시간들이 줄어들었습니다. 주말 내내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친구보다 일이 더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려니 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주변에 친구가 하나 둘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를 직장 동료, 가족들이 하나 둘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친구라고 하면 젊었을 적의 친구의 이미지만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60을 바라보는 지금, 청춘의 친구 같은 그런 친구가 있기나 한 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껏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 뭉뚱그려 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분명  청춘의 친구와는 느낌이 사뭇 다른 관계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니 그냥 두루뭉술하게 아는 사람 정도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중엔 만나면 반갑고 그래서 일없이 가끔 연락하는 사람들이 몇 있긴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친구 같은 지인이 하나 둘 생기고 있습니다.  


얼마 전, 그런 친구 같은 지인 중 한 명이 병원에 입원해서 병문안을 갔었습니다. 한 시간 이상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질 무렵에 미안한 마음과 함께 봉투를 내밀었더니, 지인 역시 미안해하며 받았습니다. 정말 스스럼없는 친구라면 이런 미안함 따위 없었을 것입니다. 알고 지내는 사이보다는 정서적으로 가깝지만 그렇다고 청춘의 친구보다는 먼 어중간한 관계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문안을 갔다 온 뒤로 일종의 충만함이 한동안 마음 한 구석을 가득 채웠습니다.  


언뜻 생각해보면 햇살은 항상 변함없이 비추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루 중에는 밤도 있고, 어스름한 새벽, 땅거미 내린 저녁도 있습니다. 흐린 날도 있고, 비나 눈이 오는 날도 있습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미세먼지가 심해서, 너무 더워서, 아니면 너무 추워서 실내에만 있는 날도 부지기수입니다. 이런 저런 시간들을 빼고 나면 정작 햇살을 즐길 수 있는 날은 의외로 적습니다. 그럼에도 햇살은 언제나 항상 환하게 비추는 것으로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 차려 보니 친구라는 말을 잊고 산지가 꽤 오래 되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일 때문에, 사는데 바빠서, 친구를 잊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당연해서 친구의 중요성을 잊고 살았습니다.  


나이 들어 보는 친구들은 '나'의 삶을 더욱더 행복하게 해주는 햇살 같은 존재입니다. 봄날의 포근한 햇살처럼, 아니면 어느 청명한 가을날 오후의 느긋한 햇살처럼, 어쩌다 가끔 만나지만 그 잠깐의 만남이 나의 삶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나이가 들어 친구의 존재를 의식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햇살 같은 친구가 그립다는 증거입니다. 그만큼 혼자만의 삶이 깊이 뿌리내렸다는 증거입니다.  


일본의 TV 드라마 '심야식당'을 보면, 눈부신 도시의 밤거리를 배경 삼아 굵고 낮은 남자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옵니다.   


"하루가 끝나고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하지만 어쩐지 아쉬운 마음에 옆길로 새고 싶은 날도 있다. " 


어찌된 일인지 현대 사회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나 홀로 족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개인이 느끼는 정서적인 허기 역시 커집니다. 일본처럼 개인보다 전체를 강조하는 사회도 드물다 보니 일본 사회에서 개인들이 느끼는 허기는 상대적으로 더할 것입니다. '퇴근길에 어쩐지 아쉬워서 옆길로 새고 싶은 마음', 이것은 각자가 나름의 방식으로 느끼는 개인적인 허기입니다.  


한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창 바쁘게 살던 중년과 장년의 시기를 거치며 청춘의친구들은 자연스레 내 곁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나 홀로 지내는 시간들이 많아지고 또 자연스러워집니다. 퇴근길에 옆길로 새는 소소한 일탈이 사회 속에서 나 홀로 살아가는 개인의 허기를 채운다면, 나이 들어 만나는 친구는 노년의 삶에 드리운 정서적인 허기와 쓸쓸함을 채워줍니다. 그것만으로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에 만나는 친구는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인생은 각자 혼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각각의 육신으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이 육신이 곧 '나'입니다. 인간은 결코 개인으로 자립하여 꿋꿋하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퇴근길에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나이 들어 가끔 보는 친구가 반가운 것도 결국은 같은 이유입니다. 비록 육신은 개인으로 흩어져 있으나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혼의 세계에서는 육신의 구별 같은 건 무의미합니다. 어쩌면 육신이 그러하듯 영혼도 낱낱이 흩어져 있다는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정서적 허기와 쓸쓸함에 빠지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부처님은 ‘숫타니파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귐이 깊어지면 애정이 싹트고 

사랑이 있으면 거기에 고통의 그림자가 따르나니 

사랑으로부터 불행이 시작되는 것을 깊이 관찰하고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때때로 홀로 앉아 명상을 하며 

이 모든 것을 이치에 맞게 행하라  

생존 속에는 근심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러나 부처님은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였습니다. “사귐이 깊어지면 애정이 싹트고, 사랑으로부터 불행이 시작된다.”는 만고의 진리를 부처님은 다시 일깨우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사귐과 애정은 단지 이성간의 연애감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간의 우정, 가족간의 우애, 부부애 같은 보다 넓은 의미의 사랑을 말합니다. 노년에 찾아오는 쓸쓸함에 눈이 멀어 친구를 찾다보면 친구에 얽매이고 친구에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니 친구라고 부르는 순간, 친구라는 그 이름에 얽매어서 더이상 친구가 아니게 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유명한 고 신영복 선생은 숱하게 많은 출소자들을 감옥 밖으로 떠나 보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빈약한 동거의 어느 어중간한 중도막에서, 바깥 사람이라면 별리의 정한이 자리했을 빈터에, 나는 그에게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서로 어떠한 ‘관계’를 뜨개질해왔던가? 하는 담담한 자성의 물음을 간추리게 된다”  


아침에 양치를 하다가 거울 속의 한 사람을 발견하고 불쑥 선생의 글을 떠올렸습니다. 선생처럼 항상 담담하게 스스로를 성찰하는 마음이 친구를 더욱 빛나게 해줍니다. 좋은 친구는 나 자신을 성찰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나 역시 좋은 친구가 될 것입니다 


좋은 친구를 찾기 전에, 먼저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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