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법문) 나와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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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증심사 댓글 0건 조회 778회 작성일 19-12-17 20:07본문
<나와 같은 >
미국은 트럭의 물동량으로 경기를 가늠할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국 내 물류 수송의 70%이상을 트럭이 담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는 8톤 트럭 같은 것 말고 미대륙을 횡단하는 아마도 수십 톤은 족히 될 것 같은 그런 트럭들 말입니다. 가끔 미국 영화를 보면 엄청나게 큰 트럭을 모는 트럭기사들이 나오곤 합니다. 하나같이 자신의 트럭만큼이나 커다란 덩치의 소유자들입니다. 웬만한 사람 허벅지 정도의 팔뚝, 덥수룩한 수염, 야구 모자 등이 그들의 판에 박힌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한국인 중에도 이런 아메리칸 트럭커들이 제법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산만한 덩치의 소유자들도 아니요 덥수룩한 수염도 기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아저씨들입니다.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서 익숙해진 트럭커의 이미지와는 완전 딴판입니다.
얼마 전 우연히 미국 내 한국인 트럭기사를 다룬 다큐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그는 운전하는 틈틈이 길 가에 트럭을 세워서 풍경 사진을 찍기도 하고, 트럭 안에서 짬짬이 소설도 쓰기도 했습니다. 외모는 그렇다 치더라도 왠지 마초적인 생활양식에 젖어있을거라 생각했던 트럭커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두 시간 가까이 되는 꽤 긴 분량이었습니다만, 눈을 떼지 않고 몰입해서 보았습니다.
오늘 아침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분들과 함께 1시간 정도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모두 오늘 처음 보는 분들입니다. 그래도 아무런 선입견 없이 그들을 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이, 하는 일, 사는 곳 같은 것들은 가능하면 물어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템플스테이 규정상 템플스테이 유니폼을 입고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템플스테이 체험자임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나는 승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선입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복장이 이미 우리들을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나를 스님을 대하고 나는 저들을 템플스테이 참가자로 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대화는 전형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찰에서 하룻밤 자 본 소감이 어때요?", "스님은 왜 출가했어요?", "사찰음식은 입에 맞나요?", "고기는 진짜로 먹지 않나요?", "심심해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갑니다. 서로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대화가 진행됩니다. 성별, 나이, 사는 곳, 뭐 하나라도 비슷한 것이 없으면 몇 가지 질문을 끝으로 대화의 소재는 금세 바닥나 버립니다. 다소 서먹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스님의 일방적이고 장황한 법문이 이어지기 십상입니다.
어쩌면 내가 대화하는 사람은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이 아니라 내 머리 속에 있는 템플스테이 참가자라는 이미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도 역시 그들 앞에 있는 내가 아니라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스님을 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나는 결국 내 안의 내 생각에다 대고 법문을 한 셈입니다.
어떤 집단의 사람들은 이미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주 두드러지기도 합니다. 폐쇄성이 심할수록 이런 현상은 더합니다. 예를 들어 조직폭력배, 교사, 비행기 조종사, 성직자 등이 아마도 그런 부류일 것입니다. 지칭하는 말 속에 이미 정해진 이미지가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아니라 그가 속한 집단의 일원으로만 비춰집니다. 심지어 그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하는 일로 그 사람을 부르기도 합니다. “스님!”, “교수님!”, “사장님!”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그 어디에도 조직폭력배는 없습니다. 비행기 조종사도 없고 성직자도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우리들의 머릿속에서 생각으로만 존재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소설을 쓰는 트럭커, 고양이를 돌보는 스님처럼 제각각의 개성과 취향이 있습니다. 이미 정해진 틀만으로 현실 속의 개인들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는 일, 직위, 나이, 지연과 학연 같은 것으로 과연 그 사람의 영혼까지 재단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같이 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굳어지고 나면 대화의 필요성이 사라져 버립니다. 부부 간에 권태기가 찾아오고, 가족 간에 대화가 단절되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생각 속에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선명하게 새겨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보고 듣고 말하고 화내는 바로 그 사람은 현실의 그 사람이 아니라 내 생각 속에만 존재하는 그 사람의 이미지일지도 모릅니다. 마치 조직폭력배, 비행기조종사, 성직자 같은 것들이 오로지 우리들의 생각 속에만 존재하듯 말입니다.
다큐에 나오는 트럭들은 당장이라도 트랜스포머 로봇으로 변신할 것처럼 육중한 덩치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운전석 뒤켠의 간이침대는 비좁기만 했습니다. 아무리 트럭의 덩치가 크다고 해도 간이침대는 일반 가정집의 침대에 비할 바가 못 되었습니다. 돋보기안경을 코에 걸친 중년의 한 아저씨가 비좁은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무릎 위에 노트북으로 올려놓고 소설을 써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몹시 불편한 자세임에 틀림없습니다. 인적이라고는 찾을 길 없는 적막하고 황량한 미국 중서부의 길가 어디쯤에 차를 세우고, 간이침대의 흐릿한 불빛 아래에서 실타래를 풀어내듯 마음 속의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를 보는 제 머리 속엔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낯선 미국땅에서 겪었을 숱한 부침과 실패, 시련과 희망, 말로 풀어내면 밤을 지새워도 모자랄 사연들이 그의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트럭커가 아닌 삶의 애환이 가득한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트럭커이기 이전에, 스님이기 이전에, 템플스테이 참가자이기 이전에, 아내이기 이전에, 아들이기 이전에, 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단 한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 자신입니다.
가끔 잠이 든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왠지 애틋한 연민 같은 것이 일곤 합니다. ‘저 사람도 나와 같이 고만고만한 하루를 버거워하며 살아가고 있구나. 그도 나와 같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평소에 내가 잘 알고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가지는 친근한 감정과는 결이 다릅니다. 오히려 이 사람이 내가 아는 바로 그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득 그 사람이 낯설게 다가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틋함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떠나 오직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가지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빚어내는 애틋함입니다. 아무런 조건없는 자비심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대상에 대한 이미 만들어진 생각이 깨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대상은 새롭게 다가옵니다. 더 이상 대상이 아니라 나와 같은 한 사람으로, 한 생명체로, 한 존재로 성큼 다가옵니다. 내 생각 속에 있는 그것의 이미지를 걷어내고 실재로 있는 그대로의 그것과 마주하게 됩니다.
평범한 하루를 살면서도 내가 만든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마주하는 지혜가 항상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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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06_중현스님.MP3 (9.9M) 3회 다운로드 | DATE : 2020-02-17 22: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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