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결 강의) 수심결 2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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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증심사 댓글 0건 조회 872회 작성일 20-02-17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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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이미 이러한 이치를 깨쳐서 다시 계급이 없다면 어째서 깨친 뒤에 닦아서 점차로 익히고 점차로 이루는 것이 필요합니까?  


<해설>

일곱번째 질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돈오에 대해서 설명을 주로 했습니다만, 이제부터는 점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해석>

깨친 뒤에 점차로 닦는 뜻을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는데 아직도 의심을 풀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다시 설명하겠으니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잘 들으라.  


범부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다섯 가지 세계에 흘러 다니어 나고 죽으면서 ‘나’라는 생각에 굳게 집착하여 뒤바뀐 망상과 무명으로 오랫동안 지금의 성품을 형성하여 왔다. 비록 금생에 이르러 자기의 성품이 본래 공적하여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단박 깨치더라도 오랫동안 익혀온 옛 습성은 갑자기 없애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좋고 나쁜 경계를 만나서 즐거워하고 짜증내며, 옳고 그르다는 생각이 불처럼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여 번뇌가 그 전과 다름이 없다. 그러니 만약 지혜로써 더욱 공들이고 노력하지 않으면 어찌 무명을 다스려 크게 쉬는 완전한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이것은 ‘단박 깨치면 비록 부처와 같지만 여러 생의 습기가 깊구나. 바람은 그쳤으나 물결은 아직도 출렁이고 이치는 나타났으나 망념은 아직도 침노하다’고 한 말과 같다. 또 대혜 종고스님도 ‘가끔 영리한 무리들은 별 힘들이지 않고 이 이치를 깨치고는 쉽다는 생각을 내어 다시 닦지 않는다. 그대로 세월이 가면 깨치기 전처럼 유랑하며 윤회를 면치 못한다.’고 하셨다. 그러니 어찌 한번 깨친 것으로 닦는 것을 버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깨친 뒤에도 오래 비추고 살펴서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도 따르지 말고 덜고 덜어서 무위에 이르러야 비로소 구경이니 천하 모든 선지식의 깨친 뒤에 소먹이는 행이 바로 이것이다. 



<해설> 

먼저 용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하겠습니다. 흔히 육도윤회라 하여 중생은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상 이렇게 여섯 세계를 윤회한다고 합니다만 여기서 아수라를 뻰 것이 다섯 세계입니다. 아상은 내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나와 남을 분별하게 되니 모든 번뇌가 여기서 비롯됩니다. 깨달음이란 곧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 즉 무아의 이치를 깨치는 것입니다. 무명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세상은 한결같이 평등하여 나와 남의 구별이 없는데 이것을 모르고 내가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세상 모든 것을 분별하고 집착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무명은 곧 무아의 이치를 깨치지 못한 상태입니다. 무명의 반대가 반야 즉 지혜입니다. 반야는 세상의 실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여 아는 것입니다. 무위는 본래 노장사상에서 쓰이는 말입니다. 무위는 아상을 깨트리고 무명을 불식하여 반야의 지혜에 이르러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나아가 온갖 분별하는 마음이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즉 반야의 지혜가 행동으로 드러나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 보조스님은 삼독심과 목우행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삼독심은 바로 중생들의 마음 즉 중생심입니다. 중생심은 이 세상의 이치와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 즉 무명에서 비롯됩니다. 무명에 휩싸인 까닭에 ‘나’가 있다는 생각이 뿌리 깊이 박혀서,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내가 있고, 내가 보는 대상들이 나와는 별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은 이렇게 주체와 객체, 주관과 객관, 나와 남을 구별하게 합니다. 이것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저것도 있게 되고 지금이 있으면 지금이 아닌 이미 지나간 과거도 있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도 있게 됩니다. 이렇게 분별심이 쌓이고 쌓이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좋아하는 것은 가지려하고 싫어하는 것은 멀리하려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삼독심의 하나인 탐욕심입니다. 좋은 것을 가지려 하나 가질 수 없고 싫은 것을 멀리하려 하나 멀리할 수 없을 때, 매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짜증이 나고 화가 납니다. 이것이 삼독심 중의 하나인 진애 즉 화입니다. 이렇게 탐욕심과 분노에 마음이 가려 사리분별에 어두운 것이 우치, 즉 삼독심 중 하나인 치, 어리석음입니다.  


이러한 삼독심은 찰나의 순간에 한 생각이 생기고 사라질 때마다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쌓이고 쌓이게 됩니다. 쌓이고 쌓이다 보면 일정한 경향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런 경향이 쌓이고 쌓여 습관이 되고 습관이 쌓이고 쌓여 버릇이 되고 성격이 되고 인격이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치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하는 뭔가가 원래부터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니 이것이 성품입니다.  


이렇게 중생심은 어느 순간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매순간 나도 모르게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쌓이고 쌓여 나의 인격과 성품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이번 한 생에만 그치지 않고 오랜 세월동안 윤회하면서 쌓이고 쌓여서 우리들의 근본 무명이 되었습니다.  


깨침은 곧 근본무명을 깨트리는 것이며, ‘나’라고 하는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히 윤회의 뿌리를 자르는 통찰인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그 뿌리가 깊다 보니 깨친 후에도 옛 습기가 남아 있습니다. 이 점을 피부에 와 닿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스님은 ‘바람은 그쳤으나 물결은 아직도 출렁이고 이치는 나타났으나 망념은 아직도 침노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바람이 그치고 이치를 통찰한 뒤에 물결을 완전히 잠재우고 망념의 뿌리를 완전히 없애는 수행이 점차로 닦는 수행, 즉 점수입니다.  


점수는 무턱대고 망념을 끊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지혜로써 닦는 것입니다. 지혜로써 닦는다 함은 남아 있는 옛 습기가 객관 대상인 경계를 만나 삼독심이 일어날 때마다, 지혜로써 비추어 살피는 일을 꾸준히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념이 본래 빈 것임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혜로 비추어 살피는 수행은 덜고 덜어서 쉬는 공부입니다. 이것이 깨친 후에 필요한 수행입니다.  


목우행은 지혜로써 닦는 것을 말합니다. 목우행, 즉 소를 먹이는 행에 대해 보조스님은 진심직설에서 “소가 길이 잘 들어서 어디든 몰고 다닐 수 있는 단계가 되었어도 아직은 채찍과 고삐를 풀어서는 안 된다. 남의 곡식밭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다스려지고 순해져서 곡식밭에 가도 곡식을 손상시키지 않게 될 때까지 좀 더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될 때라야 비로소 채찍과 고삐를 풀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위의 경지이며 크게 쉬는 경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혜스님은 영리한 사람들은 깨친 뒤에 쉽다는 생각을 내어 닦지 않으려 하니 이를 크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는 작은 깨침으로 자신을 속단하고 과대평가하는 병입니다. 보조스님도 이런 사람들을 두고 ‘도의 멀고 가까움을 모르는 자’라고 하여 경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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