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결 강의) 수심결 3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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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증심사 댓글 0건 조회 856회 작성일 20-02-17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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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용어 해설을 이어서 하겠습니다.  


도거와 혼침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도거는 마음이 바깥의 경계에 끌려 다녀서 이리저리 날뛰어서 안정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번뇌 망상이 어지럽게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나무 위의 원숭이가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날뛰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듯 도거는 마음이 들뜨고 소란스러워 흥분되어 있는 마음상태로써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선정에 장애가 됩니다.  


혼침은 경안의 반대인데, 마음을 무겁게 하고 침울하게 하고 무기력하게 하는 마음 작용입니다.  마음이 어둡고 침울한 이런 상태에 빠지면 대상을 명확하게 판별하지 못합니다. 마치 어두운 방에 들어갔을 때 방 안에 무엇이 있는지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혼침과 도거는 모두 대상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게 합니다.  


중생들은 도거와 혼침을 오락가락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의 예를 찾아보자면, 마음이 조금 기쁠 때 망상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도거입니다. 슬프거나 아플 때, 의욕이 사라지고 혼자서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있고 싶을 때 혼침에 빠지게 됩니다. 작은 칭찬에도 기분이 좋아 마음이 들뜨기도 하고 작은 비난에도 금세 토라지고 마음이 가라앉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라면 남의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으며, 일이 잘 될 때는 조심할 줄 알고, 막힐 때는 잘 녹일 줄 알아 당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혼자 있어도 즐거울 수 있고 여럿이 있어도 마음이 고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듯 혼침과 도거의 양극단 어디에도 마음을 뺏겨서는 안 되겠습니다.  


일찍이 고봉 선사는 혼침과 도거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십 년 이십 년을 풀을 헤치고 바람을 뚫고 수행해 왔건만 아직 불성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대들은 ‘혼침과 도거의 그물에 갇혔기 때문'이라고 버릇처럼 말한다. 그러면서도 이 혼침 도거라는 네 글자를 짓는 그것이 곧 불성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또 태고 보우 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생사라 한다. 이 생사에 부딪혀 힘들 다해 화두를 들라. 화두가 순일하게 들리면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어질 것이니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어진 것을 고요하다고 한다. 고요함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라고 하고, 고요함 가운데서 화두가 살아 있는 것을 신령한 지혜하고 한다. 이 텅 빈 고요와 신령한 지혜가 허물어지거나 뒤섞이게 하지 말 것이니 이렇게 공부하면 멀지 않아 깨달을 것이다. 몸과 마음이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되면 기대고 의지할 것이 없어지고 마음이 갈 곳도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영가 현각 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요하기만 하고 깨어 있지 않으면 혼침에 잠겨 있는 것이요, 깨어 있기만 하고 고요하지 않으면 생각에 얽혀 있는 것이다. 깨어 있음도 고요함도 아니라면 그것은 다만 생각에 얽혀 있을 뿐만 아니라 혼침에도 빠져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참선 수행을 하면서 혼침과 도거에 빠지는 것은 화두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혼침은 깨어 있는 마음으로 다스려야 하며 도거는 고요한 마음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이 또렷하게 깨어 있다면 혼침이나 졸음이 찾아오지 않고, 마음이 한 가지 대상에 빈틈없이 몰입되어 있다면 생각의 실타래가 뒤엉키거나 들떠 있는 도거가 발붙일 수 없습니다.  


한편, 대혜 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을 비워 없애려 하지 말고 생각을 붙이고 분별하지도 말고 다만 언제 어디서나 빈틈없이 화두만 들라. 망념이 일어날 때 또한 억지로 그것을 그치게 하지 말라. 움직임을 그치게 하여 끝내 그치게 되더라도 그것은 잠시일 뿐 더욱 크게 움직이게 된다. 단지 마음이 움직이거나 그치는 곳에 화두만을 살피라.” 


혼침이나 도거는 모두 우리 마음이 만들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혼침과 도거는 물리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본래 마음의 그림자임을 알아 본래 자리로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번뇌가 곧 보리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번 단락에서는 수상정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수상정혜에서 수상은 상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선정과 지혜가 본래 자성에 이미 갖추어져 있음을 깨달아 단박에 이루는 것이 자성정혜라면 수상정혜는 대상과 반연에 의거하여 선정과 지혜를 닦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상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를 택하는 것일까요? 첫째, 번뇌의 업장과 습기가 두텁고 무거운 반면 관행은 약하고 마음이 가라앉지 못하고 들떠 있는 사람, 둘째, 무명이 깊고 지혜는 적어서 선하고 악한 경계를 당하여 마음이 담담하지 못하고 움직이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은 반연을 잊고 마음을 쉬는 상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의 수행이 필요합니다. 상을 따르는 선정은 육근이 경계를 대하여도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는 것이며, 상을 따르는 지혜란 마음과 대상이 함께 공하여 미혹함이 없음을 비추어 아는 것입니다. 즉 대상에 의해서 마음이 산란하지 않음을 선정이라 하였고, 대상의 공한 성품을 비추어 하는 것을 지혜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수상정혜는 대상과 반연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수상정혜를 실제로는 어떻게 적용하는 것일까요? 먼저 도거가 일어나면 선정으로 산람함을 다스려서 마음이 반연에 따라 움직이지 않게 하고, 또 마음이 혼침에 빠지면 지혜로써 사물을 비추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즉 도거는 선정으로, 혼침과 무기는 지혜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는 선정과 지혜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선과 후를 가려서 대치하는 방법입니다.  


본래의 마음은 공적하면서 동시에 신령스럽게 아는 공적영지심입니다. 공적과 영지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본래의 마음인데 반해, 산란에 치우치거나 고요함에 치우치는 것이 공부하는 우리들이 쉽게 빠지는 병입니다. 수상정혜는 이러한 양극단으로 치우친 상태를 선정과 지혜로 바로 잡는 노력입니다. 즉 도거에 빠지면 선정으로 고요한 본성에 맞게 하고, 무기에 떨어지면 지혜로써 신령스럽게 아는 본성에 일치하도록 하여서 자성의 본체와 작용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수상정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노력하여 본래의 공적영지한 마음으로 돌아가면, 이것이 깨친 사람의 참다운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는 것이니 곧 자성정혜와 다르지 않게 됩니다. 보조스님은 최상의 근기를 위해서는 돈오돈수의 가르침인 자성정혜를 제시하고, 번뇌의 업장과 습기가 두텁고 무명이 깊은 이에게는 돈오점수의 가르침인 수상정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조스님은 돈문에 서서 돈오점수의 체계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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