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신행생활) 초파일에 연등을 켜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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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63회 작성일 21-05-16 13:55본문
연등은 대웅전 등의 전각 천장에 매달려 1년 내내 불 밝히는 등을 말하고, 인등은 증심사의 경우 비로전이나 오백전 부처님 옆에 줄지어 있는 손바닥만한 부처님들을 말한다. 초파일이 되면 관습적으로 연등이나 인등을 켜는 불자가 많은데 과연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부처님 당시에 난타라고 하는 가난한 여인이 살았다. 다른 사람들은 부처님이 계시는 기원정사에 등과 공양을 올리는데 난타는 너무 가난하여 등을 켤 수 없었다. 난타는 한탄했다. 경전의 내용을 그대로 읽으면 이렇다.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빈천한 집에 태어나 복밭을 만났으나 종자가 없을까?”
이 한 문장에 불교의 많은 진리가 들어가 있다.
부처님은 복밭이요 중생들은 씨를 뿌리는 농부
‘나는 전생에 무슨 죄로 빈천한 집에 태어나’ 라는 구절은 인연을 강조하는 말이다. 불교에서 인연은 곧 과보다. 과보가 없는 인연은 굳이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오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온다는 분명한 진리를 부처님은 항상 강조했다. 난타 여인도 가난한 집에 태어난 원인이 전생에 나쁜 죄를 지어서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복밭을 만났으나 종자가 없다’는 말은 부처님과 같은 위대한 수행자와 동시대, 같은 장소에 살게 된 엄청난 행운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자가 없어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지 못함을 한탄하는 것이다.
부처님을, 더 넓은 의미로 수행자를 왜 복밭이라고 표현했을까? 그리고 우리 중생들에게 왜 종자가 있다고 표현했을까? 농사를 지을 때 비옥한 밭에 씨앗을 심으면 때가 되어 열매를 맺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감자밭에서는 감자가, 당근밭에서는 감자가 열리듯 복밭에서는 복이라는 열매가 무성하게 열린다. 복은 누가 가져가는가? 씨를 뿌린 이가 열매를 수확한다.
부처님과 수행자들은 중생들에게 복을 주는 밭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전이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아무리 비옥한 밭이라도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과실을 기대할 수 없다. 아무리 부처님이 비옥한 복전이라 하더라도 중생들이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아무 것도 수확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많은 씨앗을 가지고 있어도 관리에 소홀하면 정작 필요할 때 씨를 활용할 수 없다. 우리 중생들은 모두 종자를 가지고 있지만 그 종자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
부처님과 수행자들이 복밭이고 중생들은 씨앗을 뿌리고 농사를 짓는 사람이다. 씨앗이 발아하여 성장할 때 씨앗에 살이 되는 피가 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토양이다. 부처님과 훌륭한 수행자들은 중생들에게 자신의 피와 살을 아무 조건 없이 주는 존재이며 중생들은 부처님의 피와 살을 취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존재다.
부처님이라는 토양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당신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8만4천 법문과 부처님이 살아생전 행하신 생이다. 부처님의 생을 더듬어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부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복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밭과 종자의 비유가 담고 있는 핵심이다.
불교의 믿음, 중생은 농부이고, 부처는 복밭임을 믿는 것.
불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무엇일까? 이웃종교의 경우 신이 존재하는 것을 믿을 때 천국에 간다. 하여 예수는 죽었다가도 3일만에 부활한다. 왜일까?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라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존재하는가?’ ‘부처님의 존재를 믿는가?’가 믿음의 기준이 아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한 생을 살고 죽었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에 부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부처님을 화장하여 나온 사리를 나누어 가졌다. 이웃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몹시 불경한 행동이다.
또한 이웃종교에서는 ‘하나님은 내 마음속에 항상 존재하고 계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다. 달마대사의 제자인 혜가스님이 스승에게 말한다. “마음이 너무 괴롭습니다.” 그러자 달마대사가 말한다. “괴로운 그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겠다.” 달마대사는 마음의 실체를 묻는다. 그 실체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우리 안에 훌륭한 종자가 있다는 것을 믿고 그 종자를 복밭에 뿌리고 가꾸면 부처가 되는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믿음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며, 또한 부처님의 말씀과 행 그 자체다.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부처님처럼 행동하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불자들의 믿음이다.
가난한 여인 난타는 부처님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부처님을 직접 친견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으나 복밭에 복을 지을 종자가 없음을 자책했다. 그러나 난타는 굴하지 않았다. 종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구걸한 아주 조금의 돈으로 기름을 구한다. 기름집 주인이 이렇게 적은 양의 기름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묻자 난타는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한 것이라고 답한다. 이에 감동한 기름집 주인이 기름을 주고, 난타는 이런 서원과 함께 등불 공양을 올린다.
“저는 지금 빈궁하여 이 작은 등불로 부처님께 공양합니다. 이 공덕으로써 저로 하여금 내세에 지혜의 광명을 얻어 일체 중생의 어두움을 없애게 하소서.”
난타의 등불은 다음날 아침까지도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 그날 아침 기원정사를 돌아보던 목련존자가 등불을 발견하고는 불을 끄려고 하는데 아무리 해도 꺼지지 않았다. 이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다.
“비록 네가 사해의 물을 붓거나 찬바람을 불더라도 그것을 절대 끌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체 중생을 두루 건지려고 큰 마음을 낸 사람이 보시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그 자리에서 난타 여인에게 수기를 준다. 수기란 그가 후일 어느 생에 부처가 될 것이며 그 부처의 이름을 이러이러하다 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앞날을 미루어 보고 약속을 하는 것이다.
“너는 오는 세상 두 아승기와 백겁 동안에 부처가 되어 이름을 등광이라 하고 여래의 십호를 완전히 갖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난타 여인에게 ‘너는 등광부처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난타 여인은 이 자리에서 부처님께 출가를 허락받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가난한 여인 난타의 빈자일등 일화이다.
난타 여인은 어떻게 해서 전생의 과보를 지었나.
경전에서는 이 뒤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난존자와 목련존자가 부처님께 묻는다. “저 여인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가난하며, 또 어떤 선업을 지었기에 부처님께 수기를 받을 수 있었습니까?” 부처님이 설명하시기를 다음과 같다.
난타 여인은 전생에 아주 부유한 상인의 부인이었다. 하루는 이 장자 부인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기 위해 부처님을 찾아갔는데 부처님께서는 다른 가난한 여인의 공양을 먼저 받겠다고 허락하셨다. 장자 부인은 부처님께서 자기보다 먼저 가난한 여인의 공양을 받는 것을 몹시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어찌하여 제 공양을 받지 않고 저 거지 여인의 공양을 먼저 받으십니까?”
경전에서는 장자 부인이 이렇게 나쁜 말로 성인을 업신여긴 죄로 500생 동안 비천한 몸으로 태어났으며, 그러나 그 500생 동안 부지런히 선업을 쌓은 과보로 부처님께 수기를 받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장자 부인과 같이 아상을 내는 것은 악업을 쌓는 것이다. ‘나는 배운 게 많으니까’, ‘나는 돈이 많으니까’, ‘내 자식들은 다 잘 됐는데’라고 아상을 내는 것은 그나마 쌓은 선업을 도로 까먹는 일이다.
등 공양을 한 모니 공주는 후일 석가모니 부처가 되었다.
이야기는 더 이어진다. 초라한 등불을 올린 가난한 여인이 부처님의 수기를 받았다는 것이 알려지자 온나라 사람들이 기원정사에 등불을 올려 그 등불이 7일 밤낮 동안 타올라 기원정사를 환하게 밝혔다. 이에 아난존자와 목련존자가 부처님께 다시 여쭌다.
“부처님께서는 과거 세상에 얼마나 큰 선업을 지으셨기에 이렇게 많은 등불 공양을 받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당신의 전생담을 이야기 한다. 91겁 전 과거 전생에 아리밀라라는 비구가 있었는데 이 비구는 가진 것이 없었지만 스님네들이 결제에 들어가면 등불을 공양하겠다는 서원을 세운다. 그리고 마을에 들어가서 등불을 구하기 위해 탁발을 하는데 그 모습을 본 공주가 사람을 보내 묻는다.
“존자는 늘 그처럼 수고하시는데 무슨 일을 경영하십니까?”
아리밀라 비구가 답한다.
“수행하시는 스님들에 세 달 동안 등불을 공양하기 위해 탁발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모니 공주가 말한다.
“지금부터는 구걸하지 마십시오. 제가 등을 만들 재료를 다 공급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리밀라 비구는 한 철 동안 스님들이 쓸 등을 보시할 수 있었다. 이에 부처님이 아리밀라 비구에게 수기를 주신다.
“너는 오는 세상 아승기겁 뒤에 부처가 되어 이름을 정광이라 할 것이며 십호를 완전히 갖출 것이다.”
그러자 공주 모니가 부처님을 찾아가 한탄한다.
“등을 만드는 재료는 다 제가 제공했는데 비구만 수기를 받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공주 모니에게 수기를 주었다.
“너는 오는 세상 91겁 뒤에 부처가 되어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 할 것이며 십호를 완전히 갖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전생에 공주로 살 때 수행자들을 위해 등 공양을 보시한 선업을 쌓은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리밀라 비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정광부처님이요, 공주 모니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 내 몸이니라. 나는 옛날에 등불을 보시함으로써 수없는 겁동안에 천상과 인간에서 저절로 복을 받았고 몸은 특별하여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지금의 부처가 되었으니 등불의 과보를 받은 것이니라.”
초파일에 등을 켜는 이유
부처님은 등불의 과보로 이번 생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셨다. 이 이야기로 하여금 왜 우리가 초파일에 등불을 켜는지를 반추해볼 수 있다.
첫 번째, 난타 여인은 자신을 위해 등불을 켜지 않았다. 부처님을 공경하고 존경했기에 그분에게 정성을 표시하고 싶으나 가진 것이 없으니 초라한 등불이나마 공양하고 싶다는 마음을 냈다. 부처님에 대한 공경과 존경하는 마음이 우리가 초파일에 연등을 다는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 난타 여인이 등불을 올리면서 서원하기를, 내생에는 지혜광명을 얻어 일체 중생의 어두움을 밝히겠다고 했다. 이런 서원으로 하여금 작은 등불은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었으며 난타 여인은 등광 부처가 됐다. 1년 중 초파일 하루만이라도 나 자신이나 우리 가족의 안녕보다 일체 중생이 모두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서두에 난타 여인이 자신을 한탄하기를 복밭은 있으나 종자가 없다고 했다. 우리의 신심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생각하고 부처님이 행하신 대로 행하는 것이야말로 불자들의 믿음이다. 초파일 연등을 달 때 만큼은 우리 마음 속에 신심을 가득 채우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이처럼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과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굳건한 신심을 내는 마음으로 초파일 연등을 달 때 그 의미가 더욱 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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