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신행생활) 동지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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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3회 작성일 21-05-16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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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를 앞두고 동지울력을 했다. 새알 울력이라는 것이, 인형 눈 붙이는 것처럼 동지 새알 하나에 1원씩 주는 것도 아니고 아니고, 팀별로 대항하는 것도 아닌데 참여하는 보살님들이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게 새알을 빚는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새알 울력에는 부처님과 우리 절 신도들에게 공양을 올린다는 뜻이 담겨 있지만, 실은 울력하는 동안에는 일하는 그 자체가 즐거운 행위다. 사심 없이 뚜렷한 목적 의식을 없이 그냥 함께 모여서 일하는 것 자체가 행복한 경험이다.

 

선업을 행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즐거운 마음으로 사심 없이 행복하게 그 일을 하면 그것이 나에게 좋은 과보로 쌓이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공덕을 쌓는 일이라고 이야기 했다.

 

부처님께서 생전에 재가불자들에게 법문을 할 때 가장 강조한 것이 바로 공덕을 쌓으라는 것이었다. 공덕을 쌓는다는 것은 덕을 어느 창고에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내 안에 저장하는 것이다. 어려운 말로는 식이라고 한다. 아뢰야식이라는 깊은 마음 속에 저장되는 것이기에 스스로 즐거운 마음으로 복을 지어야 나에게 공덕이 된다.

 

사실 동지는 불교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 동지라는 개념은 없었다. 동지는 북동아시아의 문화지 인도 문화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동지라는 것을 몰랐고 경전에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데 왜 우리나라 절에서는 해마다 동지를 챙기고 신도님들도 자발적으로 나와서 울력을 하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심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모여서 즐겁게 일을 하는 그 자체가 선업을 짓는 것이며 공덕을 쌓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절에서는 굳이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복을 짓기를 권선하는 것이다.

 

요즘 세상을 가만히 바라보면 이 도심 어느 곳에서 동지라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웃고 대화를 나누면서 새알을 빚을까? 곰곰 생각해봐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동지라고는 하는데 팥죽을 만들기는 번거로우니까 배달을 시켜 먹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인 경우다. 더구나 젊은 친구들의 경우엔 팥죽을 나눠줘도 맛이 없다고 사양하고 만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인생이 더 행복할까? 동지라고 팥죽을 배달시켜 먹는 사람이 행복할까, 모여 앉아 웃으면서 새알을 만드는 사람이 행복할까. 당연히 후자일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굳이 종교다 철학이다 하는 고상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나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혼자 전화로 시켜먹는 것이 일상인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동지라고 절에 모여 새알을 빚고 팥죽을 끓여 먹는 경험은 진정 소중한 경험이다.

 

부처님 당시에 ‘동지가 되면 불자들은 새알을 많이 만들어서 주변에 나눠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새알 울력을 하고 팥죽을 나누는 것은 일종의 봉사이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보시라 할 것이다. 이는 사찰이 신도들에게 봉사의 장을 제공하는, 이른 바 사찰의 순기능이다.

 

몇십 년 전처럼, 혹은 낙후된 시골마을의 노인정처럼 함께 명절을 치르고 밥을 끓여먹는 모습은 근래에 보기 힘든 풍경이다. 요즘 시대에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도시에는 없다. 그나마 사찰이 함께 하는 행복의 장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반면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기존의 기성종교는 갈수록 쇠퇴하며 종교인들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앞서 사찰이 우리 사회에 봉사의 장을 제공하는 좋은 기능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과 달리 실제로는 교회나 사찰, 성당 같은 기성종교가 갈수록 쇠퇴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몇년 전부터 계속 나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법당에도 그렇지만 10대, 20대, 30대는 고사하고 40대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청년들이 출가하지 않는다. 비구니는 더 심각하다. 실제 통계수치를 봐도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0년 동안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사람이 근 10% 늘어났다. 201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무종교인 비율은 과반수를 넘어섰다. 우리나라 사람의 56%는 종교가 없고 불자는 약 17%, 기독교와 카톨릭을 합친 기독교인이 30%를 조금 상회한다.

 

서울이나 광주 같은 대도시는 무종교인이 비율이 60%를 넘어서고, 불자 비율은 10%에 그친다. 광주 인구가 150만 명이라고 할 때 불자 비율이 10%라면 15만 명이라고 추산할 수 있지만, 이들이 모두 절에 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설문조사 결과 불자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절에 간다는 사람은 6%에 불과하다. 광주 인구로 치면 8000명 정도다. 광주에서 초파일 행사를 하면 최대한 많이 모여도 3000명 가량이다. 불자는 불자인데 절에 가지 않는 나홀로 불자가 많다는 방증이다.

 

한편 몇 년 전부터 참선수행이나 명상을 원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꾸준하게 늘어나고 있다. 최근 서울에서는 명상 관련 박람회도 열렸다. 쉽게 말하면 명상이라는 것이 비즈니스가 된다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기성종교는 쇠퇴하고 있고 불교는 더 심각한데 간화선이라던가 명상을 찾는 사람들은 꾸준하게 늘어나고 있다. 광주전남지역의 엘리트들이 모이는 전남대학교 근처에서는 신천지가 득세하고 있다.

 

종교를 안 믿는 사람들은 늘어나는데 왜 이런 사이비 종교나 신흥종교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활개를 치는 것일까? 가까운 예로 일상에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점을 보러 가기도 하고 굿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민간 신앙 또한 우리 안에서 아직 없어지지 않았다. 며칠 전 정말 오랜만에 실내세차를 했는데, 차를 찾으러 가니까 청소하시는 분이 ‘의자 밑에 천 원 짜리가 있기에 그 자리에 그대로 뒀다’고 하는 것이다. 실수로 흘린 것인데 그는 스님이 나름대로 중요한 이유가 있는, 이를테면 부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냥 웃을 수 없는 것이 예전에는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신이었는데 요즘은 누가 주인이냐 하면 돈이 신이다. ‘부자 되세요’, ‘대박나세요’ 하는 말이 덕담인 시대다. 이런 표현에 비추어 보면 요즘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고 돈이 많은 것을 해결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말할 때 누군가는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부정하겠지만, 실제 행복의 많은 부분은 돈으로 살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대하던 내 집을 마련했다고 하면 행복하다. 마음에 드는 옷을 사면 기분이 좋고, 비싼 돈 주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행복하다. 100%는 아니지만 지금 사회에서는 많은 부분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다. 그러니까 요즘 사람들은 돈을 신으로 삼는다. 종교 없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돈교를 믿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기존 종교는 쇠퇴하는데 인간은 이처럼 여러가지 형태로 종교적인 행동을 보인다. 왜 우리 사람들은 여전히 종교적 갈증에 허덕이고 있을까,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모든 종교는 결국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실존적인 물음에서 출발한다.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를 찾는다. 이는 코 앞의 나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표현된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나로 하여금 위협을 느끼게하므로 삶의 안정감을 찾고자 노력한다. 이럴 때 은행에 돈이 많으면 마음이 편하다. 통장에 돈이 많아야 마음이 편하고 미래가 불안하지 않다. 그러니까 돈이 신이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삶의 안정감을 찾고자 노력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근본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온다. 때문에 종교는 ‘네가 신을 믿으면 천당에 갈 수 있다’는 식으로 내세를 강조한다.

 

그런데 불교는 다르다. 죽음을 직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티벳불교에서는 죽음에 대해서 깊이 명상하라고 강조한다. 다른 사람이 죽는 게 아니고 나 자신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고, 그것을 명상의 주제로 삼으라는 것이 중요한 가르침이다.

 

부처님이 출가한 이유도 다른 것이 아니다. 왕자로 편하게 살다가 세상 밖으로 나가서 보니 병든 사람, 늙은 사람, 죽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아, 나도 병들고 늙어서 죽겠구나. 어떻게 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이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출가하셨다. 부처님이 얻은 답은 다른 게 아니다. 도대체 무엇이 죽는가? 죽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찾아보니까 ‘없었’던 것이다.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는 무아의 진리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전에 무엇이 죽는 것인지를 잘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나라고 할 만한 게 없으니까 죽음도 없다고 결론내린 부처님은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한 해탈을 증득한 깨달은 분이 된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죽음을 직면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막연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항상 전전긍긍한다. 어떻게든 견뎌내기 위해삶의 안정감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이런 저런 종교를 찾고 돈을 많이 확보하려고 한다.

 

그런데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스스로 수행을 해서 죽음에 직면하고 부처님이 깨달은 바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할 때 그런 노력들이 마치 은행에 차곡차곡 저금이 되듯이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저장이 되는 것이며, 장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다. 다시 말해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공덕을 쌓는 것이고, 스스로 공을 들여서 열심히 하면 자신의 수행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공을 들이면 내 안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 지금의 삶이 행복해진다.

 

더불어 우리가 행복해지는 길은 아무런 의도나 사심 없이 함께 모여서 즐겁게 일하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는 뭐든지 혼자서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인간은 태생적으로 무리 지어서 살아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요즘 세상에서는 돈만 있으면 행복을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모든 행복을 다 살 수는 없다. 돈은 굳이 말하자면 갈증이 날 때 먹는 아이스크림과 같다. 목이 마를 때 설탕물을 먹으면 당장은 좋지만 나중엔 갈증이 더 심해지는 것처럼 종교적 갈증도 마찬가지다. 종교적 갈증에 있어서 우리는 설탕물이 아니라 시원한 냉수를 마셔야 한다.

 

그런 냉수가 앞서 말한 두 가지다. 사심 없이, 그리고 함께 모여서 즐겁게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절에 안 나오는 것보다 나오는 것이 낫고, 또 절에 나와서도 가만히 앉아서 법문만 듣는 것보다 무어라도 하나 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 법문 듣는 것보다 공덕을 10배는 더 쌓는 일이라 믿는다.

 

새알 울력을 가지고 두 가지 이야기를 했다. 첫째, 아무리 종교가 쇠퇴한다고 하지만 인간이 가지는 종교적 갈증은 변함없이 여전히 우리들 속에 있다는 것. 왜냐하면 인간은 죽음을 벗어나서 살 수가 없기 때문이며  종교적 갈증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처님 가르침대로 열심히 수행을 해야 한다. 둘째, 진정한 행복은 사심 없이 함께 뭔가를 할 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21-05-21 21:38:20 연간 정기기도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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