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근엄함’ 벗은 ‘친숙한’ 오백나한님
페이지 정보
작성자 증심사 댓글 0건 조회 1,100회 작성일 19-08-18 23:21본문
'근엄함' 벗은 '친숙한' 오백나한님
‘아라한 장풍대작전’ 이란 우리나라 영화가 히트 친 적이 있었다. 여기서 ‘아라한’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나한’이다. 나한은 나한전 또는 응진전의 주인장이다. 증심사의 오백전도 ‘오백나한전’의 줄임말로 나한 500명을 모셨다는 말이다.
나한님, 누구세요?
그럼 나한이란 대체 뭘까? 궁금증부터 풀어보자. 간단하게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수행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직계제자 가운데 정법을 지키기로 맹세한 16명의 제자가 으뜸 아라한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경전을 만들기 위해 모인 500명의 제자가 버금 아라한이다. 이름 하여 오백아라한 이다. 부처와 보살 중에는 실존하지 않았던 이들도 있었으나 나한은 대개 실존인물이라는 점이 다르다.
나한이 신앙의 대상으로 발전한 곳은 중국이었다. 선종이 유행하면서 인도의 수행자였던 나한이 깨달음의 역할 모델로 인기를 누려 16나한, 500나한, 1200나한 등으로 발전하였다.
고려 초 양나라에서 사신이 500나한상을 가지고 귀국 해 해주 숭산사에 모시면서 우리나라에도 나한 신앙이 꽃을 피웠다. 왕실에서 28차례나 나한재를 열었다고 하는데 비가 오게 해달라는 기우제 성격이 가장 강했다고 한다. 그리고 외적의 침입이 잦았던 터라 어려운 국난 극복의 염원과 왕의 장수를 바라는 행사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왕실에서 나한상을 조성하고 나한전을 건립해 발원자의 무병장수와 극락왕생을 기원했다고 한다. 또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기를 염원하는 뜻도 담겨 있었다 한다.
나한님, 대들보에 앉으셨네!
증심사 오백나한은 오백전 건물과 함께 1443년 김방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정유재란 때 소실 되어 1609년에 다시 지어졌다.
최완수 선생은 그의 책에서 만들어진 기법이 영조 임금(재위 1724~1776) 때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 바 있다.어떻든 지금 오백전과 오백나한상은 조선 후기의 것임은 분명하다.
다행인 것은 경내 대부분의 건물이 1951년 4월 한국전쟁 때 불타버렸으나 오백전만은 다행히 주민들의 도움으로 화마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나한을 모신 전각의 중앙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양 옆으로 아난과 가섭 존자가 16명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나머지 나한들보다 크게 조성되어 있다. 증심사 오백나한은 모두 흙으로 빚은 것들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좁은 공간에 500명의 나한을 모시다 보니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불단을 ‘ㄷ자’ 형으로 배치하였다. 대웅전 같은 화려한 닫집도 없다.
그저 비어 있는 공간을 찾아 안치하다 보니 대들보에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앉은 나한도 있다. 그들의 표정만큼이나 재미있는 풍경이다. 이곳에선 전각이 전하는 엄숙함에서 자유로워도 될 성 싶다. 실없이 웃어도 함께 너털웃음 터뜨리며 따라 웃어줄 것 같은, 할아버지 같은 나한님들 집이라 가능한 일이다.
사랑해요, 나한님!
증심사 오백전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김방은 가뭄이 잦아 흉년에 시달리는 광주 백성들을 위해 경양방죽을 쌓았다. 3년에 걸쳐 53만명이 동원될 정도로 녹록치 않은 공사였다. 무엇보다 일꾼들의 식량을 해결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런데 그는 공사 현장에서 큰 개미집을 발견해 안전한 곳으로 옮겨준 일이 있었다. 그 뒤 개미들이 물어다주는 곡식으로 식량을 해결해 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경양방죽은 가까스로 완공 되었으나 계속된 가뭄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결국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고 ‘가뭄을 막으려면 증심사를 중건하여 오백전을 짓고 그곳에 오백나한을 모셔라.’ 라는 관세음보살의 꿈을 꾸게 된다. 꿈의 계시에 따라 반 년에 걸친 공사로 증심사 불사는 끝이 났다. 하지만 그는 몸이 쇠약해져 ‘날마다 닭똥집 20개를 먹으면 낫는다.’는 처방을 받아야 했다. 그의 건강을 걱정한 백성들이 날마다 닭을 잡아와 그는 완쾌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종대왕의 꿈에 수백 마리의 닭들이 찾아와 ‘무등산 골짜기 광주 땅에서 김방이란 자가 수천 명의 장정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켜 역적모의를 하면서 우리 닭 수 백 마리를 죽이고 있으니 마마께서 저희 축생에게도 자비를 베푸사 김방을 당장 죽여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세종대왕은 금부도사를 시켜 김방을 잡아오라 명령하였다. 그런데 학운동 배고픈 다리 근처 선거리(또는 성광이)에 이르러 달리던 말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를 않았다.
한편 이번엔 세종대왕의 꿈에 사미승 수 백 명이 나타나 ‘김방이 닭의 내장을 먹은 건 사실이나 그는 경양방죽과 증심사 오백전을 지어 백성의 생활을 편안히 하였으니 그를 벌하지 마십시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에 세종대왕이 명령을 거둬들이자 그제야 말이 움직였다.
금부도사 일행이 꼬박 이틀 밤낮을 배고픔에 떨었다 하여 다리 이름은 배고픈다리가 되었고 관원들이 서 있었다 하여 그곳을 선관이(서있는 관리, 성광이, 성거리)라 불렸다고 한다. 이야기를 갖고 있는 문화재를 대하는 마음은 색다르다. 특히나 증심사 오백전 같이 신비한 이야기가 함께 전하는 유물은 더욱 그러하다. 아는 만큼 볼 수 있다고 했던가. 살빛 도는 오백나한님, 말 걸어올 것 같다. 그냥 빙긋이 웃어야 할까 보다.
궁금해요!
부처님과 오백아라한은 전생에 특별한 인연이 있었나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전생에 바라제 라는 스님으로 살 때 이야기다. 반듯한 수행자였던 그는 탐스럽게 익은 조가 하도 보기 좋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 순간 조 세알이 손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먹자니 남의 곡식을 훔친 것이고 버리자니 아까워 그걸 먹고 스스로 소가 되었다. 3년 동안 밭 주인을 위해 열심히 일해준 덕에 주인은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주인에게 ‘내일 저녁 손님 오 백 명이 올 것이니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라.’고 말했다. 주인은 소가 말하는 것이 신기하였으나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의 말대로 오 백 명의 손님이 와서 순식간에 음식을 먹어치웠다. 그런데 그들은 칼과 창과 활을 멘 도둑이었다. 그들이 올 것을 소가 미리 알려주었다는 주인의 말을 들은 도둑들은 소를 찾아갔다.
소의 탈을 벗은 바라제 스님은 ‘나는 조 3알을 먹은 죄로 그 빚을 갚기 위해 소가 되어 3년 동안 이 집 농사를 지어주었다.
너희들은 칼과 창으로 남을 위협해 재물을 뺐으며 살았으니 몇 백번 소가 된다 해도 그 빚을 갚을 수 있겠는가?’ 하고 나무랐다.
그 말을 듣고 발심한 그들은 그의 제자가 되어 도를 닦았다. 수 십 번의 생을 거쳐 그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었고, 오백 명의 도둑은 오백나한이 되었다. 처음엔 전생의 지중한 업으로 인해 무리를 이루어 도둑질하기도 했지만 결국 아라한의 경지에까지 이르는 수행자가 되었다. 험상궂은 얼굴을 한 나한도 있는 건 전생에 도둑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설일 뿐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